불과 이삼년 전의 나는 삶의 팔십프로는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살아왔었다.
늘 우울했고 무기력했고 원망으로 미움으로 가득한 하루 하루를 살아왔었다.
참으로 까마득 가파른 고개였었고 온통 가시밭길인 험난한 세월이구나 싶어 힘겨웠었다.
그저 안으로 움츠러 들고 타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좀체 집밖을 벗어나고 싶지 않았었다.
일찍 한 결혼으로 바깥에 대한 동경이 큰 나였지만 선뜻 밖으로 나서는것은 어쩐지 두려운
든든한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편안히 안주했던 조금은 소심하고 나태했던 평범한 아줌마
였었다 어떤 미래가 펼쳐질지 별로 궁금치 않던 내 미래는 지금과 같을 것이라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아줌마였다.
신랑의 회사 파산과 일년의 무직생활,,,,
일년은 그럭저럭 그동안의 대비로 살아가는데 큰 지장은 없었다.
한가지 힘들었던것은 어른들의 말씀처럼 남자는 아침에 집을 나서고 저녁엔 돌아와야 한다는
그 평범한 생활의 리듬이 깨진것 늘 함께 있다 보니 사소한 작은 오해도 점점 크게 와 닿았던
그것이었다. 일년이 지나는 동안 난 신랑에게 금전적은 문제에 대해 의논을 할수없었다.
그러면 어쩐지 신랑이 의기소침해 지지 않을까 하는 노파심에,,,
매일 함께 있는게 힘든것은 나뿐 아니라 신랑도 마찮가지 였었는지 일주일에 두어번 낚시를 가며
잠시 혼자 있을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주는걸 난 신랑의 배려라 생각했었다.
그땐 신랑또한 힘들어 방황하고 있었다는걸 몰랐었다.
일년이란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고 생활비며 아이들 학비며 쓰임새를 도저히 맞춰내지 못할
지경에 와서야 뭔가 일을 해봐야하지 않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알아보고 있다고 하는데
내가 볼때는 전혀 일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어보였다.
어지간한 직장은 눈에 차지도 않았고 본인이 혹하는 직장은 경쟁자가 많아 조금더 젊은 사람들의
몫이 되어갔고 하던일을 직책을 하향조정을 한다는걸 못하는 신랑이 원망스러워 질 무렵 아무말도
없이 외출했던 신랑이 돌아오지 않았다.
조바심 내며 밤을 꼬박 샐 무렵 걸려온 전화에선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화가 났었다.
힘들다며 다 놓고 싶다고,,,
들어놓은 보험이 있으니 그것으로 아이들과 난 살아가지 않을까 싶다는 정말이지 기막힐 소릴 했다.
그 짧은 시간에 난 수많은 생각을 했고 마구 소릴 지르기 시작했었다.
당신같은 사람을 믿고 이십년을 넘게 살아온 나는 뭐냐고,,,
스물하나 그 어린 나이에 데려와 바깥생활은 하나도 못하는 온실의 화초를 만들어 놓고 이제와서
무슨 책임없는 말이냐고 마구 마구 소릴 질렀다. 눈물 콧물 다 빼면서,,,
마주 들려오는 울음 섞인 목소리에 그러지 말고 힘내 살아보자고 달래기 시작했다.
아직 우리 건강하고 몸 누일 집있는데 당신과 나 함께 일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뭐든 해보자고 했다.
울음끝에 어디냐고 물으니 강원도 산골이란다. 돌아오라고 돌아와야 나도 잘수있겠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몇시간 후 돌아온 신랑과 마주앉아 이야길 해봤다.
빛이 있었다.
회사 정리를 하며 이렇게 저렇게 들어간 돈과 일년을 낚시 다니며 들어간 돈 등등 합쳐서 꽤 큰 돈이
었다 감당하기 조금 버거운,,,
어떻게 그럴수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해하려 노력했다.
어차피 저질러진 일이니 전으로 돌리진 못하니까,,,
며칠후,,,
집을 담보로 대출을 받아 카드며 빛을 정리하고 난 직장에 취직을 하고 신랑은 평소 생각도 못한일을
궂은일이지만 시작을 했다. 아이들을 불러 앉히고 집안의 사정을 사실대로 말해주고 조금씩 줄여
생활해 나가자고 했더니 아들이 하는말이 대견하기도 했고 쓰리기도 했었다.
그럼 이사도 가야하느냐,,, 우리 집 없어지는 거냐며 울먹였다. 아니라고 엄마 아빠가 열심히 일해
대출금 갚으면 된다고 그저 열심히 지금처럼 살아주면 엄마 아빠 도와주는 거라고 하며 안아줬다.
그리고 삼년,,,
신랑은 여전히 열심히 일한다.
중간에 두어번 쓰러져 날 혼비백산하게 만들었지만 다행히 스트레스지 큰 병은 없다는 처방을 받고
자신도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여 적응하고 나또한 열심히 일을 했었다.
늘 야근 특근.
이자도 꼬박 내고 원금도 갚아나가고 신랑은 자신의 용돈을 아껴 가끔 필요한 몫돈이 있을땐 내놓고
그렇게 살아왔다. 사실 참 여유없는 마음이었다. 늘,,,
늦은시간 야근하고 돌아올때 엉엉 소리내어 울며 돌아온 날도 가끔 있었다.
너무 힘들어서,,, 죽도록 피곤해서,,,
하필 아들애 사춘기 들어설때 이런일이 생겨 아이가 마음을 못잡고 소소한 사고를 저지를땐 그저
죽고 싶었다. 왜 이러면서 살아야 하나 세상에 대한 원망 신랑에 대한 원망이 끝이 없었다.
우습게도 가끔 친정 부모님도 원망스러웠다.
나 이렇게 힘든데 좀 도와주지,,, 노인네들 가실때 그 돈 다 가져 가실것도 아닌데 왜 도와주지 않나
하는 어리석은 원망도 했었다.
예전의 나,,,
살짝 몽상가 기질이 있어 길가의 작은 꽃에게도 말을 걸고 뒷산에 올라가 나무에게도 말을 걸고
가끔 비오면 옥상에 올라가 비 맞으며 비 즐기고 눈오면 산으로 올라 그 황홀한 풍경에 빠지고
디카 들고 다니며 이것 저것 담아내고 주절 주절 글이라고 써대고 맛있는것 먹으러 다니고 주변에서
늘 밝다 활기차다 살림꾼이다 소릴 들으며 그것을 자랑으로 삼았었나보다.
체력도 시간도 금전도 마음까지도 여유가 없어진 나는 온 세상이 암흑 같았다.
모든게 우울했고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칩거,,, 그래 칩거했다.
세월이 약이라 했던가?
요즘들어 내가 달라졌다.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고 들어앉아 있던 날 늘 위로하고 꺼내주려던 친구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꽃도 나무도 강도 산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와 지금의 사정이 달라진것은 별로 없다. 조금 아주 조금 빛이 줄어든게 달라진거라면 그렇다.
그런데 난 세상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왜 변했을까?
세월덕을 본게 아닌가 싶다.
날카롭던 칼끝이 무뎌진게 세월때문이 아닐까?
그리도 아팠던 그 찌름이 무뎌진 칼날로 인해 좀 덜 아프게 느껴지는게 아닐까?
요즘은,,, 몇달쯤 되었나,,, 다시 디카도 들고 다니고 다시 하루하루 내 삶을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다른 눈으로 다른 마음으로 세상이 보인다.
어제 퇴근후 함께 일하는 직장의 후배가 팔이 많이 아프다고 해서 숯가마엘 갔었다.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길 하다가 내 이야기를 하게 되었는데 이야길 하면서 나또한 깜짝 놀랐다.
어느새 내가 팔십프로쯤 긍정적으로 내 삶을 바라보게 되었었다.
어느틈에,,,,
삼년이란 세월을 보낸 사이에,,,,
얼마전 카페에서 힘들다는 친구의 글에 달았던 댓글이 생각났다.
열가지 다 행복할수 없듯 열가지 다 불행할수도 없다 찾아보면 한가지 쯤은 좋은 일도 있을거다.
그러니 기운내라 했던 댓글.
오래전,,, 내가 막 힘들어지기 시작할때 썼던 글중에 이런 대목이 있다.
행운도 세가지 불행도 세가지가 함께 온다고,,,
어디선가 읽었던 내용이었는데 세번쯤 행복하다 느끼면 찾아올 불행에도 대비를 하란 말이었다.
그때 힘겹다 느꼈을때 나 자신을 위안삼아 즐겨 썼던 말이었다. 일종의 자기 암시였다.
이제 하나 남았다. 이번만 잘 넘기면 불행의 삼연속이 끝나고 행운이 찾아올거야 라고,,,
행복할땐 행복하다 자만하지 말고 조금 더 자숙하고 불행할땐 불행하다 쓰러지지 말고 다가올
행운을 받아들일 넓은 마음을 준비하자 그리고 넓은 마음 즉 큰 그릇으로 살자.
혹 행운이 내려준다면 작은 종지에 담기지 말고 넓은 그릇에 가득 담기라고,,,, ㅎ
긴 이야길 왜 쓰냐하면,,, 별로 알리고 싶지 않던 내 사생활을 왜 썼냐 하면 요즘 친구들이 어렵다는
힘들다는 글이 종종 올라와 힘내보라는 내 마음의 작은 선물이다.
행복은 저기 모퉁이만 돌면 있어 기운내서 우리 씩씩하게 모퉁이 돌아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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